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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愁 / 鄭芝溶
[来源:文学世界 | 作者:管理员 | 日期:2013年9月4日 | 浏览2316 次] 字体:[ ]

【특별기획】

    2013년제17회중국연변지용문학제 제2차지용백일장이 어제 즉 9월3일날,우리학교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이 경사로운 날을 맞이해 특별히 정지용의 유관자료를 골라 게재하오니 참고로 감상하여주길 바란다.

향 수 (鄕愁)

정지용(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인의 생가입구. 왼쪽에보이는 물레방아가 정겹다.


향수 詩碑.


충청북도 옥천 고향에있는 정지용 문학관의 밀랍상.
 

향수(鄕愁)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다른 시비는
일본 동지사대 교정에 윤동주 시비와 함께 있다.

정지용(鄭芝溶)은 1902년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며 그가 노래한 시 향수(鄕愁)는
고향을 떠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아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며 메아리 치고있다.

 

정지용(鄭芝溶)과 향수(鄕愁)

정지용(鄭芝溶, 음력 1902년 5월 15일/양력 1902년 6월 20일 ~ 1950년 9월 25일)은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아호는 지용(池龍)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 되었으나, 1988년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었다.

생애: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한의사인 정태국과 정미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하여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학조 學潮〉에 시〈카페 프란스〉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평론가 이헌구,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1933년〈가톨릭 청년〉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시와 소설〉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경향신문〉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는 납북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휘말려 향년 49세로 사망하였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력:

1902년 (1세)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1910년 (9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들어감.
1913년 (12세)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
1914년 (13세)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함.
1918년 (17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함. 학교성적은 우수하고 집안이 어려워서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음.
1922년 (21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함.마포 하류 현석리에서 첫 시작품인〈풍랑몽〉을 씀.
1923년 (22세) 일본 교토 시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함.
1924년 (23세) 시〈석류〉·〈민요풍 시편〉을 씀.
1925년 (24세) 〈새빨간 기관차〉·〈바다〉등을 씀.
1926년 (25세) 《학조》 창간호에〈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신민》·《문에시대》에 〈Dahlia〉·〈홍춘〉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
1927년 (26세)〈뻣나무 열매〉·〈갈매기〉등 7편의 시를 교토와 옥천을 오가며 씀.《신민》·《문예시대》·《조선지광》·《청소년》·《학조》지에 〈갑판우〉·〈향수〉등 30여편의 시를 발표함.
1928년 (27세) 장남 정구관 출생(음력 2월).《동지사문학》3호에 일어시〈馬1·2〉를 발표함.
1929년 (28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함.12월에 시〈유리창〉을 씀.
1950년 (49세)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정인택,김기림.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 도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작품경향:

시인 정지용은 초기엔 모더니즘과 종교적(로마 가톨릭)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널리 알려진 작품 <향수>에서 보이듯이 후기엔 서정적이고 한국의 토속적인 이미지즘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그만의 시 세계를 평가 받고 있으며 전통지향적 자연시 혹은 산수시라 일컫는다.

작품:

〈향수〉(鄕愁)
〈유리창1〉
〈바다9〉
〈비〉
〈장수산〉(長壽山)
 소설〈삼인〉(三人)

기타:

그의 대표 작품 중 향수는 1995년에 통기타 가수인 이동원과 박인수 서울대학교 교수가 듀엣으로 곡을 붙여 불렀으며, 이 노래는 앨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 실렸다.

강원룡은 훗날 회고에서 그가 김구의 지지자라고 했다. 동시에 그가 여운형의 지지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 *** *** *** *** *** *** *** *** ***

 

['한국일보' 김기영기자 보도자료]

"정지용,동두천서 美폭격에 사망"자료 공개

박태상교수 17일 세미나서 새로 발굴산문 전집에 실려


그 동안 사망 시기와 정황 등이 밝혀지지 않았던 정지용(1902~?)이 1950년 가을 경기 동두천 소요산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숨졌다는 증언 자료가 공개된다. 박태상(48) 한국방송대 교수는 5월17일 충북 옥천에서 열리는 세미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북한 시인 박산운의 회고문 ‘시인 정지용에 대한 생각’을 발표한다.

이 글은 평양에서 발간되는 ‘통일신보’ 1993년 4월24일과 5월1일, 5월7일자 등 3회에 걸쳐 게재된 것으로 조총련계 조선대 김학철 교수가 박 교수에게 제공했다.

박산운은 회고문에서 “92년 여름 북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셋째 아들 구인씨와 함께 소설가 석인해의 집을 찾아가 정지용이 50년 가을 한국전쟁 때 사망한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석인해는 “그 해 9월21일 아침 남쪽에서 문화공작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동두천에서 정지용을 만났다”며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동두천 뒷산을 넘었는데 산 이름이 ‘소요산(逍遙山)’이라는 말을 들은 정지용은 ‘이름이 풍류적’이라며 껄껄 웃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태백산 줄기를 타는 동쪽으로 길을 잡고 정지용과 함께 오고 있었는데 불시에 미국 놈들의 비행기가 날아왔다. 일행을 발견한 비행기는 곧바로 기수를 숙이더니 로켓 포탄을 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증언했다.

또 “비행기가 사라진 뒤 정지용을 찾아보니 가슴에 총을 맞고 이미 숨져 있었다”며 “그때 정황이 허락치 않아서 할 수 없이 동무(구인씨)의 아버지 시신을 대충 묻고 통일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봉분을 만들어 드리자고 했는데 참 안됐소”라고 말했다. 이후 구인씨도 1995년 6월 통일신보에 “아버지가 북으로 오던 중 경기 동두천 소요산 기슭에서 비행기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정지용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기 고양군 녹번동(현재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잠시 외출한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 갖가지 추측과 소문이 무성했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정지용이 평화교화소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계광순 전 의원의 회고가 소개된 바 있다.

한편 최근 발간된 ‘정지용전집’ 개정판(민음사 발행)에는 새로 발굴된 산문 ‘수수어(愁誰語)_혈거축방(穴居逐放)’이 실렸다. 이 글은 ‘주간서울’ 1948년 11월29일자에 실린 것으로 이북에서 온 일가족이 정지용의 집 앞에 있는 방공호를 파서 거처로 삼으려고 땅을 파냈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는 과정을 담았다. ‘수수어’는 정지용 시인이 자신의 일상사와 상념을 녹여 쓴 일련의 짧은 산문에 늘 붙였던 이름이다.


‘주간서울’에 실린 산문 ‘수수어_혈거축방’


노래: 이동원, 박인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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